2025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졸업 전시회에 시다(바리)로 작품 준비에 참여했습니다. 2주간의 고된 노동과, 특히 스트레스가 많았던 마지막 이틀의 밤샘 작업 이후 눈을 뜬 7월 1일의 아침은 썩 불쾌했습니다.
준비 과정에서 차질도 많았고, 평소 지향하는 - 세심한 설계를 통한 생산적인 노동 - 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작업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활하지 못했던 커뮤니케이션, 제작자의 편의와 디테일이 고려되지 않은 부재들, 중요하지 않은 요소에 분산된 노동력 등 여러 면에 있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전시였습니다.
이상 이유들로 생긴 수면부족과 맞물린 무력감, 그리고 연이은 정보처리기능사 필기 시험의 압박 속에서 저는 슬럼프에 빠지고 말았는데, 이 글에서는 지금은 극복한 슬럼프에 대한 회고와 더불어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을 짧게 나누고자 합니다.
슬럼프를 자각한 이후 건강한 음식도 먹고, 휴식도 취해봤지만, 컨디션은 나아질 낌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서도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최후의 수단으로 특단의 조치를 결심했는데, 아픈몸을 끌고 “일단 뛰고 오자!”는 것.
한강 변을 따라 성수-동호 대교 사이를 뛰면서 제 기분은 금방 나아졌습니다. 사실 달리기 자체보다도 제 기분을 결정적으로 풀어준 것은 내 앞에서 뛰시던 아주머니의 티셔츠에 그려진 그래픽이었는데, 오늘 이야기도 바로 이 그래픽에서 출발해보려 합니다.
대충 상단에는 The Problem 이라고 쓰여있고, 그 밑에 점점 글자들이 흐릿해지면서 The Poem으로 바뀌며 끝나는 디자인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Pinterest Shit Motivation quote이라며 욕했을 테지만, Problem이 많은 상황이라 그런지 눈길이 갔고, 이후 뛰는 내내 계속 생각을 맴돌았던 것 같습니다.
Problem은 어떻게 Poem이 될 수 있을까?
듣기에 그럴싸한 동기부여로 끝나지 않으려면 우리는 Poem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Poem의 의미가 중요해지는 것은, 모든 Problem을 GRIT으로 이겨내자는 기존의 동기부여와 차별화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 아주 직관적으로 따져봤을때, Poem은 문제를 포용하는 어감이라면, GRIT은 문제를 시스템 하에 통제하는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
이 티셔츠에서 사용된 Poem이라는 단어가 제게 처음 전한 인상은 바로 다음 인용구에서 쓰인 poetisch라는 단어의 용례와 가장 유사합니다.
“Wohnen heißt: poetisch wohnen der Mensch auf dieser Erde.”
— 『...dichterisch wohnet der Mensch...』
“인간은 지구 상에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적 거주’란?
시적으로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상태일까?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고 미화하라는 뜻일까?
그보단, ‘삶을 시로 감각하는 태도’에 집중해야 것입니다. 정돈되지 않은 현실을 애써 분류하고 통제하기보다는, 흘러가는 대로 느끼고, 의미를 묻기보다 감응하려는 자세. 그리고 무엇보다, 불합리한 순간들을 미학적으로 포용하려는 감성. 이건, 문제를 견디는 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선택입니다.
궁극의 시스템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파훼’할 수 있다는 이성만능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현대사회인만큼, 창보다는 갈대처럼, 쇠보다는 물처럼 문제에 대처하는 ‘시적 문제해결력’이 더더욱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인식의 전환은 제게 또 다른 철학자들을 떠오르게 했는데, 한 명은 니체. 그리고 또 한 명은 카뮈입니다.
시적 살아감에 대한 보충 : 카뮈와 니체를 중심으로
카뮈는 시시포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우리는 시시포스를 행복한 사람으로 상상해야 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가장 부조리한 상태조차도, 스스로의 선택으로 긍정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선택이 곧 예술이며, 반항이고, 시라고 믿었습니다. 바위를 굴려야만 하는 숙명에서 탈출할 수 없다면, 그 바위를 사랑해버리는 것. 저 또한 이번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그 불쾌감 전체를 껴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니체 왈.
“Amor fati: das soll fortan meine Liebe sein! Ich will nicht Krieg gegen das Hässliche führen.”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나의 진정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 나는 추함과 싸우지 않겠다.”
Amor Fati! 이 글의 주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구호가 아닐까요. 니체라면 Problem? Poem 티셔츠를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삶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를 하나의 ‘춤’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니 말입니다.
정리 : 삶에서 시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시란 질서 정연하고 이해 가능한 문장이 아닙니다. 파열과 반복과 생략을 담아낸 형식. 논리보다는 울림으로, 해석보다는 존재로 -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시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시는 해석 이전의 수용, 논리 이후의 수긍, 그리고 고통을 아름답게 직면하는 용기에 가깝습니다.
슬럼프를 통해 제가 배운 가장 중요한 태도는, 더 나은 날이 올 거라고 믿는 낙관도, 이겨내겠다는 근성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슬럼프조차, 언젠가 한 편의 시가 되리라는 직감"입니다.
결론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는 좋은 삶을 살고 싶다는 말과 동치입니다. 하지만 이해되는 이야기 만이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문제의 반대말은 해결책일까요? 아니요, 문제에는 반대말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체로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통은 성장의 기회여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Son destin lui appartient. Sa pierre est sa chose.”
— 『Le Mythe de Sisyphe』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며, 그의 돌은 그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 돌을 지고 있습니까? 두려워 마십시오. 당신의 돌은 아름답습니다. 그 돌을 어찌해야 의미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돌을 가진 당신은 그 자체로 이미 아름다운 이야기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삶, 그럼에도 살아가는 모든 독자들에게 이야기의 가호가 있기를 응원하며 글을 마칩니다.